스토리콜렉터의 이야기/도깨비 이야기

김서방을 구슬피 울게 만든 남자 인간 이야기 2

주인도깨비 2024. 4. 1. 11:27

상황을 파악한 남자 인간은 다리에 힘이 풀려 허망하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의미 없다는 것을 알지만, 모래를 손에 움켜쥐온 채 용궁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 이어 귀가 찢어질 듯한 괴성과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은 하나의 짐승이 포효하는 것과 꼭 닮아 있었다. 이를 본 다른 남자 인간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고, 몇몇은 피가 맺힐 듯이 입술을 꽉 깨물고, 또 몇몇은 용궁 앞에서 두 손을 맞대곤 연신 파리처럼 비볐고, 또 어떤 이들은 눈구멍에서 눈물을 폭포수같이 쏟아내며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워했다. 용궁 앞은 혼돈 그 자체였으며, 위압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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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흔들) “이봐요, 병원에 도착했어요. 뭔 땀을 그렇게 흘리십니까.”

 

남자인간은 택시 기사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전혀 구분은 안됐지만, 어서 의사를 찾아야 한다는 그 사실만큼은 또렷했다. 택시 기사의 손에 던지듯이 한쪽 주머니에 있는 돈을 건네주고, 문을 열고 나와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부여잡고, 씨뻘 개진 눈알을 굴리며 하얀 옷을 입은 의사를 찾았다. 마치 사냥개가 사냥감을 찾는 모습과 같았지만, 막상 먹잇감 앞에 마주 서자 말을 더듬기 바빴다. 자신의 아내 좀 살려달라고, 용궁 앞에 보았던 그 남자 인간들처럼,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맞대어 연신 비벼댔다.

 

급하게 왕진가방을 싼 의사와 함께 초록대문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 억 겹의 시간을 느낀 남자인간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한가득이었다. 초록대문 집 문 앞.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고요할 뿐이다. 이상하리만큼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온몸이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남자인간은 부글거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문을 열었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나있었다. 모든 것이.


 

 

남자인간은 일도 나가지 않은 채 계속 눈을 감았다. 다시금 그 용궁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용궁 앞에서 빌면, 여자 인간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사흘, 보름, 한 달… 농에 붙어사는 김서방은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주인도깨비를 찾아 떠났다. 그리고 밤도깨비가 붙어사는 요술항아리 하나와 밤의 기운을 담은 항아리 받침 하나를 얻어, 다시 초록대문 집으로 돌아왔다.

 

요술항아리를 얻어온 그날 밤, 남자인간은 꿈을 꿨다. 예전처럼 여자인간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꿈이었다. 별빛이 수놓아진 밤하늘을 걸으며, 달빛과 바람이 몸을 간지럽히자 까르르 웃는 여자 인간의 손을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잡았지만, 바닥이 어딘지도 모르는 그곳에 발 내딛는 즐거움도 잠시, 여자 인간은 점점 녹아내렸다. 다급해진 남자 인간은 여자인간을 붙들었지만, 애처롭게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여자인간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금붕어처럼 입을 계속해서 뻐금거렸다.

 

그렇게 다 녹아내린 그 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 동동 거리는 남자 인간 옆으로 밤도깨비가 슬쩍 얼굴을 들이밀었다. 귀를 움찔거리며 하품을 쩌억 하더니, 남자인간을 꼭 껴안은 채, 밤하늘 위를 뛰어들었다. 남자 인간은 버둥거렸지만, 계속해서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상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밤도깨비의 살랑거리는 꼬리가 남자인간의 등을 계속 토닥였고, 남자 인간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토해냈다. 눈물이 잦아들 무렵, 남자인간은 헉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남자 인간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오른손을 더듬더듬 뻗어 요술항아리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푸석해진 얼굴, 축축하게 땀으로 젖은 손으로 눈을 쓸어내리고, 까끌한 수염을 손끝으로 쓸고선,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오랜만에 마주한 스스로의 얼굴이 볼만했는지 이내 탄식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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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동이 트면, 남자 인간은 밤새 자란 수염을 여자인간의 얼굴에 비벼댔다. 여자 인간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졸음을 한가득 담은 눈으로 남자인간을 흘겨봤다. 남자인간이 웃으며 여자인간의 코끝을 간지럽히면, 여자인간은 남자인간의 품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남자인간은 여자인간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해 머리를 감았다. 아직도 한 밤인 여자인간을 어르고 달래며, 칫솔에 치약을 쭉 짜 여자인간의 입에 넣어줬다. 화장실로 무거운 몸을 일으켜 들어온 여자인간이 겨우겨우 양치를 끝내고 도망가는 것을 붙잡아, 얼굴에 묻혀 비누칠을 해줬다. 고양이 세수를 끝마친 둘은 같이 손을 잡고 화장실을 나오며 아침에 뭘 먹을지에 대해 도란도란 얘기했다. 보통 그전 날에 먹다 남은 저녁 반찬을 다시 데워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여자인간이 아침을 만드는 동안, 남자인간은 맛있는 냄새를 배경 삼아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이불을 털어 고이 개어 농에 넣고, 온 방바닥에 가득한 여자인간의 머리카락을 열심히 쓸고 닦았다. 그러다 보면 여자인간이 바닥청소를 하는 남자인간에게 포르르 다가와 오늘 아침 메뉴가 뭔지 맞춰보라고 묻고, 아까 대화를 나눈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남자인간은 모르겠다고 답했다.

"오늘은 된장찌개야!"

밝은 목소리에 남자인간은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싱긋 웃으며 기대된다고 답하며, 여자인간의 손을 잡고 식탁 앞으로 향했다. 같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달그락 거리며 아침밥을 먹을 때마다, 여자인간은 오늘은 일하러 가지 말고 자기랑 놀자고 남자인간을 유혹했다. 그러면 남자인간은 웃으며 오늘 일을 끝내고 오는 길에 있는 시장에서 맛있는 걸 사오겠다고 말하며, 여자인간은 그럼 마중을 나가겠다고 발을 동동 거리며 신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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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인간이 이 초록대문 집에 오기 전부터, 하루의 시작엔 항상 여자인간이 있었고, 하루 끝에도 마찬가지였다. 소소한 일상을 함께 하며, 좀 더 짙고 깊은 하루로 넓혀갔었다. 그렇게 남자인간은 평소의 아침을 곱씹으며, 수염을 밀었다. 혼자서 양치를 하고, 세수도 했다. 오랜만에 온 몸에 물을 끼얹고 샤워까지 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을 대충 툭툭 닦고, 벌거벗은 채로 잠시 식탁에 앉아 이부자리를 멍하니 응시했다. 뽀얗게 먼지 쌓인 농 앞에, 유난히 햇살에 반짝거리는 유리컵이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저 유리컵으로 물을 마셨던 것 같은데... 저런 컵이 집에 있었던가?'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