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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콜렉터의 이야기/도깨비 이야기

김서방이 아꼈던 작은 인간 이야기 2

주인도깨비 2024. 3. 21. 23:58

2024.03.04 - [낮도깨비 이야기] - 김서방이 아꼈던 작은 인간 이야기 1

 

김서방이 아꼈던 작은 인간 이야기 1

김서방은 애가 닳았다. 밥솥에 붙어 계속 눈동자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동동거렸다. 작은 인간 때문이다. 작은 인간은 저녁 7시면 집 대문을 여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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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작은 인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조리법을 한참을 뚫어지게 읽었고, 이후로 작은 인간의 하루가 다시 평소처럼 돌아오기 시작했다.

 

 


작은 인간이 조리법을 뚫어지게 쳐다본 그날 밤

 

작은 인간은 조리법을 뒤적거리다, 가장 먼저 냉장고부터 뒤적거렸다. 이내 냉장고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외투를 걸친 다음, 슬리퍼를 질질 끌며 어둑한 바깥으로 향했다. 작은 인간이 다시 집 문을 열고 들어올 땐, 곧 찢어질 것만 같은 검은 봉지가 양손에 한 가득이었다. 왜인지 오랜만에 눈에 살짝 생기가 비쳤고, 그 눈길의 끝은 검은 봉지 안에 들어있는 싱싱한 레몬과 입에 별사탕이 쏟아질 것만 같은 사이다와, 여러 가지 주전부리로 향해있었다.

 
작은 인간은 검은 봉지를 옆으로 치워두곤, 요술항아리 조리법을 다시금 뒤적거렸는데,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내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을 때, 생기를 더하는 조리법

1. 라임(없다면 레몬)을 깨끗이 씻는다.
2. 물기를 닦고, 반은 슬라이스로 썬다.
3. 요술항아리에 남은 반을 손으로 꾹 짠다.
4. 사이다를 넣는다.
5. 위에 슬라이스 조각을 얹고, 휘휘 저어 마신다.

효과: 마음속의 뜨거운 불은 도깨비가 쫓아내고, 시린 얼음들은 도깨비가 녹여준다.

 
작은 인간은 요술항아리를 덥석 집더니, 레몬을 넣고 대충 수저로 짓이긴 다음, 그 위에 사이다를 붓곤, 휘휘 저어 꼴깍꼴깍 삼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혀 끝의 단맛이 강렬함을 느낀 작은 인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화장실로 들어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고, 한동안 물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앉은뱅이책상에 붙어사는 김서방이 걱정스러운 눈망울로 요술항아리의 낮도깨비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그저 조금 더 기다려보라며 싱긋 웃을 뿐, 별다른 사족은 없었다. 한참 후에 잔뜩 물에 젖은 작은 인간이 화장실을 나와, 대충 몸을 수건으로 툭툭 닦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밥솥을 열었다. 밥솥에 붙어사는 김서방이 그 어느 때보다 노력해서일까, 윤기가 흐르는 밥알을 보곤, 작은 인간은 밥공기에 주걱으로 밥을 꾹꾹 눌러 담아, 별다른 반찬도 없이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그날 밤이 며칠 지난 뒤

그날 밤이 지나고, 작은 인간은 매번 요술항아리 조리법을 뒤적거리며 요술항아리를 손에 놓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한참 해가 중천에 떠있는 시간에, 앉은뱅이책상에 붙어사는 김서방이 흐느껴 우는 소리에 다들 깜짝 놀라 일어났다. 밥솥에 붙어사는 김서방이 무슨 일이냐며 걱정스러운 소리로 물어보니, 말없이 작은 인간의 일기장을 들이밀었다.

 

언제부터인가 무기력과 우울 그 사이에 잠식됐다. 처음으로 사회에 내디딘 발걸음이기에 좀 더 굳건히 버티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을 내버려 두고 서울로 올라와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는 모습이 꽤 멋있다고도 생각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 생각이 나의 발목을 잡았던 것 같다. 회사에서 조그만 실수도 너무 크게 느꼈고, 부담감이 커져 더 큰 실수를 연쇄적으로 불러일으켰다.

그러다 보니 밖에서는 꽤 괜찮은 차림새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부터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바로 인상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선로를 따라 계속되는 부정적인 생각이 스스로를 좀먹었고, 개찰구를 나와 마주하는 집 앞 신호등에선 늘 멍하니 서있었다. 쌩하고 달리는 차들 사이로 걸어 나가면, 깔끔하게 치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되뇌던 어느 날, 집 문을 열고, 평소와 다름없이 신발을 갈아 신는데 대차게 넘어지고 말았다.

신호등 앞에선 차에 치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으면서, 무릎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짐에 고통스럽자, 모순되는 이 감정이 괴로워 눈물만 와르르 쏟아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버린 걸까, 왜 나는 힘들까, 우습지만 마치 영화 속 비련의 여주인공 행세를 하며, 주저앉아 있는 나를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나 연고 없는 이 차가운 도시에 나를 위해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은 없었고, 그냥 주저앉아 외로움에 다시 잠식되려고 할 때, 바닥을 짚은 손 끝이 간지러웠다. 고개를 들어보니 온 집 안 바닥이 내 머리카락으로 뒤덮여 있어 흠칫 놀랐다. 언제부터 청소를 안 한 건지, 이 어둠 속에서도 머리카락과 먼지들이 굴러다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한숨을 한 차례 쉬고,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대충 물티슈로 머리카락과 굴러다니는 먼지들을 보이는 족족 쓸어 담아 휴지통에 버렸고, 매번 빨지 않아 쭈글거렸던 옷들도 세탁기에 던져 돌려버린 다음, 오랜만에 밥솥에 밥도 안치고, 쌓여있는 설거지도 다 해치웠다.

그러다 툭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요술항아리 조리법이라고 쓰인 책자가 떨어져 있었다. 책자 안에 아까 설거지할 때 못 보던 유리컵에 그려진 고양이와 똑같은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다. 언제 이런 걸 샀었던가? 아니면 어디선가 받았던가? 제대로 기억나진 않지만, 열어보니 재밌는 조리법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띈 "내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을 때, 생기를 더하는 조리법"을 한참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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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요즘 좀 이상했다. 생기를 더하는 조리법으로 만든 음료를 마신 다음부터, 소소하지만 진짜 행운이 따랐다. 지하철에서 내 앞에 자리가 나는 경우도 생기고, 회사에서는 PM분이 새로 채용되면서 회사 전반적인 프로젝트의 담당들을 재배치해주셨다. 일의 효율이 늘어 야근이 줄었고, 결과론적으론 매출이 잘 나서 인센티브도 받게 됐다. 진짜 숨통이 트이는 나날들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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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일기장에는 작은 인간의 수많은 생각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작은 머리에 이렇게 많은 생각을 욱여넣으니, 매번 기운이 없을 만도 하지 않았냐며 모두 웅성거렸다.

 

소란스러운 틈 바구니 속, 앉은뱅이책상에 붙어 있는 도깨비는 요술항아리에 붙어사는 낮도깨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작은 안긴이 생기를 느낄 수 있었던 건, 현실로 돌아와서 그런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낮도깨비도 김서방의 말에 동의하며, 생각에 갇혀버리면 일상을 못 느낀다며, 현실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간들이 살아가는 데 바람직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일상이 제 마음대로 안되면 인간은 쉽게 땅을 파고 들어간다고, 이때 소소한 행운을 더해주면, 금세 행복함을 느끼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들을 자기는 사랑해 마지않는다고 덧붙였다.

 


 

작은 행운이 더해진 이후로, 작은 인간은 다시금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데 여념이 없었다. 아침 7사에 노랫소리를 듣고 일어나,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로 화장실로 들어갔고, 정신없이 후다닥 집에 나간 다음, 저녁 7시면 다시 집에 돌아와, 앉은뱅이책상에 음식들을 늘여놓아 열심히 오물거렸다. 밥을 다 먹곤, 집을 치우고, 씻고, 다시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열심히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앉은뱅이 책상에 붙어사는 김서방의 말에 의하면, 요즘은 여러 곳을 돌며 다양한 음식을 먹으러 가고 싶다는 말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작은 인간은 종종 집을 떠나기 일쑤였다. 배낭을 메고, 온갖 것들을 보고, 먹고, 즐기고 오는 듯했다. 여전히 작은 인간의 소소한 일상은, 그 집안 김서방들의 재밌는 이야깃거리이며, 작은 인간의 소소하고 생생한 일상이 변함없이 계속되도록 언제나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고 있다.